우리의 삶은 수많은 규칙과 질서 속에서 유지된다. 사회가 정한 규율은 때로는 안전망이 되어 주지만, 때로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벽이 되기도 한다. 유치원 교사인 주인공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은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적 규율이 실제로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다. 『오렌지와 빵칼』은 단순한 성장 소설이 아니다. 이 작품은 일상의 틈새에서 느껴지는 억압과 개인이 처한 사회적 위치를 섬세하게 조명하며, ‘자유’와 ‘통제’라는 두 가지 상반된 개념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규율과 질서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때로는 그 경계를 넘어 자신만의 길을 찾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 글에서는 『오렌지와 빵칼』이 보여주는 삶과 규율의 경계, 그리고 개인의 자유에 대한 메시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제목: 오렌지와 빵칼
저자: 청예
출판: 허블
책소개:
스스로 만든 감옥을 내던지며 웃다
한국과학문학상 장편대상 수상 작가 청예의 SF 미스터리
자유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도발적인 이야기
SF x 미스터리 x 리얼리즘을 훌륭하게 버무린 서사의 향연
2년 만에 〈제9회 교보문고 스토리 공모전〉 단편 우수상, 〈제4회 컴투스 글로벌 콘텐츠문학상〉 최우수상, 〈제1회, 제2회 K-스토리 공모전〉 최우수상, 〈2023년 제6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까지, 초단기간 내에 연달아 문학상을 수상한 청예 작가.
포근한 로맨스 소설부터 미래 기담 SF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청예는 이윽고 본인 내면에 있는 질척하고 순수한 검은 감정을 내보이며 독자를 찾았다. ‘욕 먹을 각오’를 하고 용기를 내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썼다. 그렇기에 강렬한 소설 『오렌지와 빵칼』이 허블에서 출간됐다.
사회생활 속에서 자기 검열은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가끔은 그것이 자신도 모르게 강화되고, 남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각박해진다. 검열의 범위는 타인으로까지 번진다. 각자의 정의가 강해질수록 권리처럼 행해지는 타인을 향한 재단과 편견은 그 범위가 넓어져 ‘노키즈존’, ‘SNS 마녀사냥’등 사회문제로까지 번지고 있다.
자신만의 ‘정의’를 내세우며 그것이 ‘선’이라 고집하는 이들에게 작가는 말한다. “너무 단편적으로만 생각하는 거 아닐까?” 이 생각으로부터 『오렌지와 빵칼』이 시작됐다.
“웃음을 상실한 지가 너무 오래됐다”라는 서술로 시작하는 『오렌지와 빵칼』은 모두가 한 번쯤 겪어봤을 상황 속으로 독자를 이끈다. 현실감 넘치는 설정과 등장인물의 면면은 과장되었음에도 언젠가 만나본 것처럼 익숙하다. ‘정서 변화 시술’이라는 과학적 상상력으로 만든 장치는 감초처럼 기능한다. 욕망과 충동, 위선과 죄책감 사이에서 흔들리는 주인공의 내면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강렬한 반전이 찾아온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누군가는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을 것이고 누군가는 스스로와 주변을 돌아볼 것이다. 가볍게 시작하고 무겁게 끝나는 소설. 여름철, 섬뜩함과 시원함을 함께 선사하는 이야기로 현실에서의 일탈을 꿈꾸던 독자를 만족시킬 것이 분명하다.
#양극단 사이, 나의 세계에는 두 영역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 같은 흐릿한 요소들이 선명한 것들보다 더 많았다. 반면에 은주는 세상을 보다 명쾌한 시야로 인식하기에 오직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만 존재하기를 바랐다. 그녀는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는, 혹은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어떠한 분류가 자기 세상에 머물 권리를 박탈시켰다.
#아무리 봐도 입방체로 존재하는 타인이 스스로가 다면체 생물임을 표현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을 때. 그들이 가지는 생각이 은주의 가치관과 일치하지 않을 때. 그럴 때 은주는 특히 학을 뗐다. 이유는 간단할지도. 낯선 입방체를 자기 스펙트럼 안에 끼워 넣으면 견디지 못하니까. 검은 선과 흰 선만 있다고 믿는 이들은 빨간색 큐브를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 충돌했다가는 이 세상이 휘황찬란한 팔레트가 되어버리는 비극을 맞이할 테니.
#똑똑한 사람이 지시하면 세상은 다양한 면을 삭제해야 마땅했다. 그러니 나 역시도 그녀 앞에 서면 능숙히 몸을 움츠렸다. 일차원의 존재가 되는 일은 나의 안전이 아니라 그녀의 안전을 도모하는 일이었다. 이것이 내가 다면체가 되기를 거부하며 평면적으로 잘못하고 사과하기를 반복하는 이유였다.
#"조금만 생각하면 더 잘 살 수 있어." 모기에게 물린 듯이 부푼 혀의 옆면을 잇몸 안쪽에 문질렀다. 아팠다. 피가 조금 나는지 쇠맛이 났다. 얼얼하고 화끈한 구슬이 다시는 섣불리 입을 놀리지 말라 경고하며 입안에서 굴러다녔다. 대화를 멈추고 은주의 회초리 같은 사랑을 되새김질 했다. 조금만 더. 나는 고개를 재차 끄덕였다. 조금만 더. 근데 얼마나 더?
#삶은 이런 식으로 노력을 자주 비껴갔다. 단일 선택지가 선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병렬적으로 쌓이면 악행으로 치닫기 쉬웠다. 이웃에게 조금이라도 밉보이지 않으려 손수 그릇을 치웠고, 길고양이까지 챙기려 했고, 이를 위해 가급적 흠결이 없는 제품을 구매했던 나의 연쇄적인 노력들은 염분을 제거하지 ㅇ낳은 참치 하나로 나쁜 짓이 됐다. 윽박지르던 중년의 눈 속에 나라는 존재는 패악질을 저지르는 빌런일 뿐이었다 .그녀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내가 고른 선택지들을 모두 설명할 수 없었다. 우리의 세계에서 부연 설명은 반칙으로 통했으니까. 선하고자 하는 도덕적 욕망을 추구하는 일은, 가끔 패배가 정해진 게임에 참여하는 일처럼 불합리했다.
#지금이라도 달아날까. 세 걸음만 물러나면 문 앞에 설 수 있다. 하지만 알고 있다. 오영아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수원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그를 사랑하지 않고, 심지어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징그럽게 곁에 붙어 평생을 살아갈 여자가 나였다. 만약 우리 둘 중에 한 명은 인간이고, 한 명은 거머리라면 내가 바로 거머리였다.
#빚을 내 마련한 투룸 빌라에서 수원과 시작할 아침을 상상했다. 아마도 나는 신혼집의 전세 대출금을 서둘러 갚기 위해 수원의 권유와 달리 일을 관둘 수 없겠지. 우리는 아침마다 사회복지센터와 유치원으로 갈라져 기진맥진할 때까지 각자의 지옥에서 시달린다. 어두워져서야 퇴근할 것이고, 대출을 갚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25마트에서 저급한 식자재를 사 온다. 눈을 맞추고 밥알을 꼭꼭 씹으며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추상들을 논하는 채로 밤을 맞이한다. 여전히 투 블록 머리를 한 남자의, 여전한 체크무늬 셔츠를 벗기고 목덜미를 혀로 핥는다. 사랑이 없어도 사랑을 연기하는, 무려 5년 동안 반복된 야밤의 배우 활동을 재개한다. 우리는 적당한 시간 동안 몸을 섞는다. 신음 후 몸이 식으면 빌라 1층으로 내려가 고양이 밥 위에 염분이 제거되지 않은 참치를 얹는다. 손을 잡고 오늘 밤도 아름답노라 찬양한 뒤 다시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것으로 하루는 끝나겠지.
#내가 이런 곳까지 올 줄은 몰랐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번아웃인가. 우울증 초기 증세일지도 모 르지. 모서리가 팬 정신을 방치한 채로 살고 싶지 않아 이렇게까지 노력하고 있으니, 아직 나에게는 갱생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이 마음가짐만으로도 나는 '정상'의 범주에 속하지 않나? 내 안의 나를 향해, 오늘까지 내가 한 선택중에 틀린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지금의 고통도 금방 사라지리라는 주문을 읊었다. 나는 괜찮을 것이다. 문제없을 것이고, 나는 정상이며, 정상이었고, 정상으로 살 것이다. 잘못된 건 어느것도 없을 것이다. 모든 건 순간적인 불안과 금방 사그라들 우울일 뿐이었다. 이것이 격려인지 자기방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어떤 날은 베토벤의 비창을 들으며 아는 척하고 싶다가도 어떤 날은 케이팝을 들으며 엉덩이나 흔들고 싶었다. 내 일상을 구축하려는 타인들의 아포리즘을 지적해 보고 싶고, 그것들을 지키려 하는 은주에게 어깃장을 놓고도 싶고, 수원에게 사랑하지 않음을 고백하고도 싶다. 그럼에도 존중받고 싶었다. 아니다, 존중처럼 귀한 마음은 바라지도 않았다. 여기 내가 있고, 당신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다. 당신은 그것을 싫어하지만 곁에 남아 줄 수 있다고 말해줬으면 한다.
#은주는 아직 몰랐다. 사랑만 봐서는 사랑을 모른다는 점을. 진정으로 사랑을 논하고 있다면 은주는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조금이라도 더 봐야 마땅했다. 구정물이 존재해야만 호숫물이 맑다는 걸 알게 되듯 혐오가 이 세상에서 맡은 역할은 절대 소멸하지 않는다. 그녀의 사랑은 더러운 것들을 비난하면서 완성되니까.
#과연 인간은 감정을 칼로 무 자르듯 분할할 수 있을까. 나의 마음에서 테두리를 이루던 추상들이 난잡하게 쏟아져 나왔다. 과거에 내 마음은 고체였다. 라벨을 붙이고, 적합한 시기와 장소를 골라 제자리에 보관해 뒀다. 적시 적소에 꺼내 쓸 수 있게끔. 그러나 스칼렛이 전두엽을 건드린 순간 그 모든 고체들이 액체로 바뀌어 한데 모였다. 기쁨이 고통과 섞이고, 분노가 슬픔과 뒤엉켰다. 나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사람. 그래서 이래도 고통스럽고 저래도 저주스러운 사람. 무엇이 무엇인지 도통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가 돼버렸다.
#우리는 결여된 존재로 남고 싶어 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결여를 채우는게 가끔은 버겁다. 있는 그대로 수용되길 원한다. 비록 내 도덕성이 상대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해도, 내가 이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지 못해도, 심지어 그 정의에 균열을 만드는 존재라 할지라도. 그냥 살아 있고 싶다. 있는 그대로. 나는 그런 우리에게 공감을 던지고 싶었다. 공감과는 가장 거리가 먼 말들로.
좋은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언젠가 부터 내가 나로서 살아가기가 힘든 시기가 온 것 같다. 직장생활에서도 일상생활에서도 늘 누군가를 배려해야 하고 좋은 사람이어야 하고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감 속에 살아가는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고 내 곁에 머물러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 모두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더없이 힘든 일이다. 나 또한 그냥 나로서 받아들여지길 원한다.
어쩌면 인간관계는 내가 나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없는지로도 나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꼭 좋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조금 나쁜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혹은 좀 못되먹었더라도. 자유롭게.
그러나 우리들은 결국 위선을 선택하는 선택을 할것이다. 그게 안전하기 때문에.
관계에서 상처받고 싶지 않고, 소외되고 싶지 않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나'를 외롭게 만드는 선택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두에게 나를 있는 그대로 다 보여주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살아가며 한명 쯤.
나의 있는 모습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인생 숨쉬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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